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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찾는다, 찾아온다

출처: http://blog.johnrchildress.com/2014/03/30/a-new-paradigm-for-executive-search/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찾는다. 아침에 출근하며 들을 노래를 검색하고, 볼만한 기사가 없는지 본다. 바야흐로 검색엔진이 지배하는 세상아닌가?!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의 핸드폰의 80%이상은 구글의 안드로이드이니 말이다. 우리는 덕분에 편리해진 이 스마트폰으로 맛집도 찾고 목적지, 길, 방향, 찾고 싶은 것 무엇이라도, 하다못해 친구도 찾는 세상이다.

찾는 것이란 전제에는 항상 더 좋은 것이 없을까, 이왕이면 더 싸고 질 좋은 것, 혹시 내가 모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깔려 있고, 그래서 검색이라는 먼길을 나선다. 검색의 심리에는 불안함이 있다. '못찾으면 어떻게하지?'

이것은 정보가 주는 잘 못된 결과다. 정보란게 편리한 것 같지만 이로인한 스트레스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아마 정보화는 지금 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다르게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내 마음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찾는 것  말고 찾아오는 것 - 그것에 우리는,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문든문득 드는 생각의 인사이트, 묵상, 휴식 등이 있는지 말이다. 우리 삶은 온통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것 밖에 없어 보인다. 잠시라도 눈을 감고 나를 비롯하여 가족, 주변사람, 이 나라, 온 세상을 (인터넷 검색 없이) 생각하고 그 결과를 행동에  옮긴 적이 있는가 말이다. 나부터서도 외부의 자극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본다. 누가 그랬고 뉴스와 반응이 이러하니 나도 그정도 생각하여하나 싶다. 

하지만 이와 반대편 입장에서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어찌 정확이 아냐는 거다. 지피지게 백전백승! 외부의 정도에 대비해 생각을 넓혀가야, 비교해야 내가 어찌할지 알지 않겠냐는 거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많이 찾아서 아는 만큼 내 행동, 생각의 반경이 커진다는 것은 정말 그렇다. 

정말 그런가? 이것도 정보의 역린아닐까?! 즉, 내게 약한 부분이 있어서 뒷쳐지고 나란 존재를 남과 비교하여 어느 위치에 두지 읺으면 불한한 그 무엇 말이다. 

왔다 갔다 한다. 무엇이 옳을까?!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불안함인데, 이는 인간의 한계 - 세월호 앞에서 느끼는,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하루하루 반복하며 느끼는 나의 실수와 무능함에 직면하여 느끼는 존재을 불확실성 때문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란 말인가? 그 누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서로서로 정보를 주고 받고 그러다 방대해진 이 정보화 바벨탑을 매일 검색하며 사는 것 아닌가?! 

나는 결국 인간의 바벨탑이니 하며 거창하게 논하려는게 아니다. 때론 검색에만, 외부에만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멈추어 서서 나를 찾는 사람, 필요로하는 곳, 손 길,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음성(성경 망씀)에 마음을 열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다. 이는 검색으로 안된다. 앉아서 태고로부터 정해진 말씀을 읽고 외부로 향한 눈을 감고 내면에서 들리는 - 생각과 영혼이 이어지고  하나님 음성으로 문득 떠오르는 그것을 매일 잡아야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야 미래가 있고 그래야 남을 인정하게 되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열왕기상 11장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신우회 1년 성경통독으로 열왕기상 - 솔로몬의 이야기를 읽다가 묵상한 내용입니다.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44426846@N03/6983252539

하나님은 죄악을 그대로 놔두시지 않는다. 

솔로몬은 그렇게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받아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가 말년에 하지말아야하는 외국여자를 데려왔고 또 그들과 즐길 뿐 아니라 그들이 하자고 하는데로 우상 신 섬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신이 죄 짓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했던 것이다. 그의 지혜서인 잠언과 전도서를 읽고 바로 이 부분을 읽어서 그런지 그는 허무에 빠져버려 이제는 헛된것 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살기로 한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그 때에도 나타나 친히 말씀하셨고, 게다가 그렇게 평화로운 지평이 대적들이 하나 둘 일어나는 상황으로 개입하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나는 이 말씀을 7월 중순께 읽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전도서를 다 읽을 때 그저 솔로몬의 최후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그 다음 장을 이어 읽기 위해 이전 장의 내용을 훑어 보던 중 이 말씀이 나의 상황과 함께 마음에 들어오게 된것이다. 바로 지금의 상황 때문에 그런것 같다. 

나는 나의 지금 경험하는 상황이 그냥 그저 단순히 마음이 아픈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솔로몬처럼 지혜를 가진것도 아니요, 또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나를 그와 같이 소중하게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말씀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죄를 짓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이다. '내가? - 나 힘들어.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런데 죄라니? 죄는 한가롭게 할 것도 없어서 쓸데 없는 짓으로나 하는거 아냐?' 하는 생각이 항상 나를 죄 없는 사람, 죄 지은 틈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죄를 지었고, 아직도 죄인이며, 삐뚤어져 있고 옳바르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되었다. 솔로몬처럼 돈이 없어서 그렇지 나는 이미 마음으로는 벌써 외국 여자들에다가 우상 산당을 백만개도 더 지었다. 그 우상은 나를 즐겁게하는 세상의 모든 신이다. 나의 오감(five sense)이야 정말 몇 안되지만 그것을 즐겁게 하기 위한 산당은 얼마나 많은지 눈앞에 가득할 정도다. 

자, 이제 실상과 상황, 그리고 말씀의 메시지를 알게되었으니 결단을 할 때다. 결단이라는 것은 마음으로, 말로도 혹은 글로도 아닌 행동으로, 매일의 삶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있는 이 지하철의 공간에서 또는 새벽의 조용한 시간에서 소리 없이 더욱 치밀하게 나의 생각의 직조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상하게 하는 좀벌레 다루듯이 해야한다는 말이다. 

솔로몬처럼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3년 7월 2일 화요일

확신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7시간 근무한 것보다 1시간 이야기를 하는게 힘들구나 - 새삼 알게된다. 

오늘 같이 나눈 이야기가 내 마음으로 이어진다. 

생각보다는 질문이다. 나는 어떤 확신으로 이자리, 오늘날까지 이르렀지?! 어떻게 중요한 인생의 고비를 넘겼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보잘것 없는 믿음과 확신이었지만 나름 확신을 믿으며 온 것 같다. 주변의 도움도 많았다. 특히 오랜기간 동안 아내가 내 곁에서 때론 지팡이 또한 말씀의 전달자로서 지켜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나의 확신을 확신하게 되었을까? 

확신을 확신 할 수는 있는건가?!

동등한 개념과 동등한 레벨의 속성이 서로 확신을 줄 수 있을까?! 즉, 내가 생각하고 내가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 모순아닐까?!

아니다. 이건 모순이 아니라 단편적이서 그렇다. 여기에 인정이라는 개념과 관계라는 시간을 드리우면 확신은 확신을 할 수 있다. 

확신을 인정해주는 누군가 있다면, 하지만 그것은 자동 응답기처럼, 자판기처럼 나오는 무엇이 아니리라. 시간 속에서 관계가 깊을 때 찾아오는 믿음라 할 수 있다. 

내가 어떤일을 하고자 했을 때의 확신을 확신할 수 있는 힘은 그 일과 그 주변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정과 그 인정을 끌어낼 수 있는 지속적이고 신뢰된 깊은 관계가 규명을 해준다. 물론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 인생이기 때문에 사람을 지으신 만군의 여호와의 인정과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관계여야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또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Here and now, I'm looking for You, my Lord.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가장 가까운 예배, 일상의 노래를 들으며,,

한웅재2 앨범의 한 노래를 들으며 오늘의 신보라 알려보려고 페북에 올리다가 작은 글이 이어져 여기에 기억해둔다. 


두마음

그대의 마음 속 어딘가 있는 그 빛을 일상으로 꺼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줄 그 힘을 세상으로 꺼내, 한 순간 나를 건너 그에게로 나를 넓혀가는 그 때,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 하늘이 말씀하신대로,

//
우리에게는 딱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하고픈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가 아닌것 같기도 하는 마음을 자주 접하게 된다. 계속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 하지만 그 때는 결정의 순간 아니라 결단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생각의 주체자인 나를 떠나서 나를 지으신 분을 생각하고 맡기기 시작하면 생각의 길은 바람을 타게되는 것 같다. '그 길이 맞아?' 로 시작했다가, '그래, 그 분과 함께 가보자!'로 마무리 하면서  앞으로 쑤욱 나아가게 되는 경험- 사람이 혹은 일이 힘들어질 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면 그분의 마음으로 사람도 일도 품게 될거다. 그런 일이 일어날려면 내 손에 꼭 쥐고 있는 무거운 것이 무엇이 없나 보게 되고  좀 더 마무리를 잘해보려고 하게 된다. 

새로운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마음에 이어본다.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큐티하는 방법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highersights/6231641551

아침에 묵상하는 방식이 나를 새롭께 깨우고 있는 것 같아 나름 묵상하는 방식을 정리합니다.

묵상은 창조

저는 묵상을 주로 아침시간에 합니다. 요즘 창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침 묵상 시간이 창조의 시간이라고 스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 어둠과 혼돈 가운데 하셨던 것 처럼, 어둔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혼돈의 꿈속에서 깨어나서 말씀으로 질서를 잡는 것이 마치 천지창조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출근길 버스나 전철에서 보고 있으면 그저 지나가버릴 만원 출근길이 창조의 시간이 된다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뭐 책이나 영어 공부, 업무를 할 때도 있지만 그 무엇도 창조라는 생각을 못하는데, 그것이 길바닥이 되었던 만원 전철이 되었던간에 큐티를 하고 있으면 묘하게 창조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에 한장 주욱

우선 저는 성경 본문을 주욱 읽어 나갑니다. 하루에 한장을 기준으로 하고 성경책 순서대로 읽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한글로만 혹은 한가지 버전 보다는 두가지 버번으로 교차해가며 읽으면 그냥 지나칠 내용이 마음에 닿을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영어 버전과 같이 읽는데 잘 못하는 영어지만 문득 문득 깨달음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주욱 읽어 가면서 마음에 느껴지는 바, 혹은 신기한것과 할말이 생각난 게 있으면 적으면서 봅니다. 저는 주로 출근길에 하기 때문에 책이나 공책에 아닌 아이패드로 성경앱과 에버노트를 활용합니다

4가지로 정리

그렇게 적다 보면 어느새 한 장을 다 읽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아래 질문 4가지를 하고 답을 생각하고 다시 찾는 과정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은?
2. 교훈은?
3. 적용은?
4. 나는?

원래 3번까지 했었는데 권민의 <자기다움>을 읽고 4번이 생겼습니다. 적용점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다짐을 하게되는데 나를 돌아보고 살필 때 자연스러운 묵상의 과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1번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던 시선이 교훈을 받고 내 주위(적용)를 지나 나에게로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이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내 안에 가느다란 한 줄기가 언젠가는 굵고 깊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오늘의 경험으로 이 포스팅을 하게 했는데 그것른 바로 말씀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앞서 말한데로 저는 하루 한 장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에 특별히 닿는 느낌이 들거나 특이한 점, 그리고 뭔가 할말이 있으면 본문 절을 복사해 붙이고 저의 말을 적는데 바로 이렇게 적은 것과 본문의 키워드들이 '나는'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것입니다. 제가 바로 발견하고 저에게 닿은 부분이니까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누가복음 5장을 묵상했는데 본문을 주욱 읽으면서 1차 (이 1차 단어로 생각난 단어가 아닌) 단어로 "따르다, 바로 앞, 한적한 곳"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글을 적는 순간에도 이 단어들을 잊기는 했지만 아마 같은 본문을 보면 또 똑같은 단어을 산택했을 것이고 아니면 변화된 내가 그 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단어를 뽑고 말씀의 단어들을 나에게 적용시켰을겁니다.

이렇게 선정된 단어들로 묵상하다보면 '이다, 아니다, 하고싶다' 등으로 말씀이 내 안에 창조의 질서가 잡히는 것입니다.

결론

아무튼 말씀 묵상은 내 안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매일매일의 순간이고 이런 창조의 역사가 '나는'의 내가 만들어질것이라 확신하고, 새롭게 창조되는 나를 기대해봅니다.

#퇴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