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7일 목요일

'공공기관의 민간 클라우드 이용 가이드라인' 살펴보기

#오늘의정보보호 #오늘의기사는 여기를 참고

지난해 9월 클라우드법(클라우드컴퓨팅 발전 및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령과 함께 시행이 되면서 그 이후로 올해초부터 '클라우드 보안인증제'가 시행되면서 5월에 설명회도 개최가 되어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공공기관의 민간 클라우드 이용 가이드라인'가 나와서 간단히 살표 보았다. 
대상은 공공기관이고, 민간 클라우드 이용 가능한 서비스는 IaaS, SaaS, PaaS 라고 클라우드법 시행령의 용어를 따라 설명하고 있다. 즉, '클라우드 보안인증제'는 아직까지는 IaaS 로 한정하고 있는데에 반해 민간 클라우드의 서비는 제한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정보자원의 등급을 정하는 것이 핵심이며 3등급은 통보하는 것으로만 사용이 가능하지만 2등급은 '정책협의체'에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가이드에서는 법령상 '비공개 정보'의 근거 항목을 제시하고 있고, 표준계약서와, 표준SLA 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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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자정부법" 상 공공기관
- 전자정부법 제2조제3호(정의)
- 전자정부법시행령 제3조(공공기관의 범위)

2. 근거 - "전자정부법" 제54조(정보자원 통합관리)
- "국가정보화기본법" 제23조의3(데이터센터의 구축 및 운영 활성화)

3. 용어 "클라우드컴퓨팅서비스"
- 클라우드컴퓨팅법 시행령 제3조(클라우드컴퓨팅서비스)
  > IaaS, SaaS, PaaS 
- "보안인증" - "클라우드컴퓨팅법" 제23조2항 

4. 이용 절차

- 정보자원이 3등급 혹은 한번 이용한 사례가 있으면 통보
- 국정원 "국가 공공기관 클라우드컴퓨팅 보안 가이드라인" 
- 계약서, SLA 작성

5. 이용 자체 검토
- 사전검토 (시스템, 구현성, 경제성)
- 본검토 (정보자원 등급 평균값)

6. 법령상 비공개 정보
- '정보공개법' 상 비공개 정보 ('15.12)
- '공공데이터법' 상 비공개 정보 ('15.12)

7. 자체 구축,운영과 민간 클라우드 비교
- 비교 예시

8. 정보자원 등급 참고
- 등급에 따른 평가기준

9. 표준 계약서

10. 표준서비스준수협약서(S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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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정보보호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아이들은 아빠의 무엇을 닮는가, 어릴수록

출처: http://sierrasourcemedia.com/wordpress/copywrited-material-all-right-reserved/father-and-baby/

커갈수록 아이는 자신만의 생각, 보는 눈, 또 친구가 생기면서 아버지의 겉모습, 자기에게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점점 더 받게 됩니다. 당연한 것이겠죠. 하지만 어릴 수록, 태어나자마는 어떨까요? 아이가 아빠인지 생각해서가 아니라 보고싶은 마음, 안기면 바로 아는 것, 아빠를 알아만 보는 것, 보고 웃는 것.. 이런 작은 것들로 영향을 받겠지요?! 하지만 이게 그저 지나가는 일상적이것, 작은 것 일 뿐일까요?!       

아! 이 점을 조금만 더 빨리 인지하고 (안다고 해도) 깊게 생각하였 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요. 내 자신이 우리 아이들 앞에서 더 잘 정의가 되었을 것이고 기도로 더 무장하였을 텐데요. 하지만 지금도 그리 늦은건 아닙니다. 첫째를 봐서도 그렇고, 둘째는 이제 돌이 방금 지났으니까요. 이제 시작이죠. 

개인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지만 아이들은 아빠의 태도, 목소리도 닮지만 어릴수록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다시피하는 것 같습니다. 영적이라고 해서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그냥 저 멀리 있은 것으로 치부하는게 아니구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앞에서의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점이 다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은 태도나 목소리 그 이상이고, 더 본질적입니다. 행간의 뜻 처럼 보이지 않게 나를 주관하는 영적 상태가 아이들의 닮은 꼴에도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글의 큰 결론은 없습니다. 어제 퇴근 길 문득 깨닫게 된 것을 마음에 한번더 새기고자 글로 써 보게 되었습니다. 

@David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I surrender

전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가끔 온다. 이해하려해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면 계속 싸우거나 어느 한쪽이 포기해야 한다.


Hillsong Live "I Surrender"

이 때에는 내가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에 고착화된 평함, 익숙함으로 부터 다시 여행을 떠나야할 차비를 해야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일이다. 내가 나를 떠나야하는 상황인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 못 했다간 '자아분리'라는 병 아닌 병으로 정신병원에 가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어떻게 나에게서 떨어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해야한다. 

지금 이 비정상적이고 말도 안되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란 바로 이런 여행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익숙함과 평안함이 가져다 주는 안일함과 인생의 안주할 수 밖에 없는 시점에 주어지는 시험이자 축복이다. 

나를 다시 한번 더 업그레이드 해야할 때이다. 

바로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어쩌면 싸울 수록 숙제는 더 많아진다. 이 때는 바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내 마음에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인생에 있어 몇 안되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아무 음성에 아무렇게 생각나는데로 내어 맡기면 안될 것이다. 이럴 때 일 수록 우리의 기초인 말씀과 기도 밖에 없다. 평소의 기초체력이 중요하지는 시점이라 할 수 있겠다. 

나를 지으신 분 앞에 솔찍해지고 도우심을 구하자. 

다시한번 다짐하지만, 싸울 때가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뿐아니라 나 자신과도 마찬가지다. 나의 마음을 돌아보고자 애쓰는 것은 진정으로 솔찍해지는 것이다. 그동안의 겉모습, 잠깐 조금 솔직하지 않은 겁데기를 탈피해야할 시기인것이다. 뱀은 생애에 허물을 몇번 벗은다고 하더라? 아무툰 엄청 많이 벗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자신이 벗은 겁데기를 양식 삼아 먹는다! 

결론이다. 

이런 경험은 순간이다. 순간에 결정된다. 싸우지 말자. 억울해할 필요 없다. 하나님 앞에서라. 업그레이드 시기를 즐기는 것이다. 

- Your David. 

             

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찾는다, 찾아온다

출처: http://blog.johnrchildress.com/2014/03/30/a-new-paradigm-for-executive-search/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찾는다. 아침에 출근하며 들을 노래를 검색하고, 볼만한 기사가 없는지 본다. 바야흐로 검색엔진이 지배하는 세상아닌가?!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의 핸드폰의 80%이상은 구글의 안드로이드이니 말이다. 우리는 덕분에 편리해진 이 스마트폰으로 맛집도 찾고 목적지, 길, 방향, 찾고 싶은 것 무엇이라도, 하다못해 친구도 찾는 세상이다.

찾는 것이란 전제에는 항상 더 좋은 것이 없을까, 이왕이면 더 싸고 질 좋은 것, 혹시 내가 모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깔려 있고, 그래서 검색이라는 먼길을 나선다. 검색의 심리에는 불안함이 있다. '못찾으면 어떻게하지?'

이것은 정보가 주는 잘 못된 결과다. 정보란게 편리한 것 같지만 이로인한 스트레스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아마 정보화는 지금 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다르게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내 마음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찾는 것  말고 찾아오는 것 - 그것에 우리는,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문든문득 드는 생각의 인사이트, 묵상, 휴식 등이 있는지 말이다. 우리 삶은 온통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것 밖에 없어 보인다. 잠시라도 눈을 감고 나를 비롯하여 가족, 주변사람, 이 나라, 온 세상을 (인터넷 검색 없이) 생각하고 그 결과를 행동에  옮긴 적이 있는가 말이다. 나부터서도 외부의 자극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본다. 누가 그랬고 뉴스와 반응이 이러하니 나도 그정도 생각하여하나 싶다. 

하지만 이와 반대편 입장에서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어찌 정확이 아냐는 거다. 지피지게 백전백승! 외부의 정도에 대비해 생각을 넓혀가야, 비교해야 내가 어찌할지 알지 않겠냐는 거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많이 찾아서 아는 만큼 내 행동, 생각의 반경이 커진다는 것은 정말 그렇다. 

정말 그런가? 이것도 정보의 역린아닐까?! 즉, 내게 약한 부분이 있어서 뒷쳐지고 나란 존재를 남과 비교하여 어느 위치에 두지 읺으면 불한한 그 무엇 말이다. 

왔다 갔다 한다. 무엇이 옳을까?!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불안함인데, 이는 인간의 한계 - 세월호 앞에서 느끼는,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하루하루 반복하며 느끼는 나의 실수와 무능함에 직면하여 느끼는 존재을 불확실성 때문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란 말인가? 그 누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서로서로 정보를 주고 받고 그러다 방대해진 이 정보화 바벨탑을 매일 검색하며 사는 것 아닌가?! 

나는 결국 인간의 바벨탑이니 하며 거창하게 논하려는게 아니다. 때론 검색에만, 외부에만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멈추어 서서 나를 찾는 사람, 필요로하는 곳, 손 길,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음성(성경 망씀)에 마음을 열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다. 이는 검색으로 안된다. 앉아서 태고로부터 정해진 말씀을 읽고 외부로 향한 눈을 감고 내면에서 들리는 - 생각과 영혼이 이어지고  하나님 음성으로 문득 떠오르는 그것을 매일 잡아야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야 미래가 있고 그래야 남을 인정하게 되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2014년 4월 24일 목요일

My Son's Favorite Things

매주 목요이 마다 팀 내 몇 명과 함께 영어 발표 스터디를 한다. 주제는 아무거나. 주로 자신에게 있었던 일상적인 일로 정했지만, 그것이 이벤트가 되었던 여행이 되었던 괜찮고, 또 나누고 싶은 좋은 기사나 프리젠테이션, 혹은 요리나 음식에 관한 것 등 주제가 다양하다. 다만 영어로만 한다는 점. 참여하는 사람은 4명 정도다.

어제는 무얼할까 한 주 내내 고민하다가 구글 플러스에 백업된 지난 사진들을 보니 아들 보배가 좋아하는 것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그래서 주제를 "My Son's Favorite Things"로 정하고 간단하게 파워포인트 3장에 몇개 사진 넣어서 발표했다. 다들 재미있어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난 주말에 산에 간 이야기, 뉴욕의 명소, 그리고 네이티브와 영어로 메일을 주고 받은 일상에 대해 소개했다.

이 모임에 영어 네이트브나 교정을 해주는 사람이 없이 우리끼리 말하고 끝낸다. 그래서 내가 발표한 것을 여기에 옮기는 것도 많이 틀릴 수 있지만 그저 자주 보고, 앞으로 계속 일상에 대해 영어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하는 것이다.

#1

First thing is playground. No matter about wherever playground is. He is always OK that is even small in my apartment, or that is also big like Everland. Both of thme is same to my son until now, just until now.

Second thing is a car. He bought this car in flea market last Sunday. Actually this was very dirty, when I saw it. So I didn’t want to buy it. But He grizzled and cried but there was no choice to only buy it to him. So His mom cleaned every nook and corner inside of the car. Finally he got the car, then he look like very happy and smiled eventually.

And third thing is the animal especially the elephant even like a doll. Now a days, going to the mart, my son directly go to the toy section. Why is the toy section placed at the entrance of mart? I realized why it is that I have kids in my family. So in this picture, my son didn’t keep going any more, even though there was a lot of things to have to do. He want to get this animal doll - one is tiger and  another is elephant. Finally I and my son compromised to buy only one that is elephant, later on. So he continuously talk about how do he likes elephant after leave mart. I promised that if he likes that until May next month, I buy it to him as children's day presents. So he continue to say “I love the elephant, I love the elephant ... !!” restless at home.

#2

Next, My son really like thing is going to the Zoo. That picture is taken in the zoo which name is 테마주주동물원 in Il-San. I think an admission ticket was very expensive for all my family. This zoo’s main feature is that we can feed directly animals and can look closely them.

Second thing in this page, is balloon playground that is very good to young kids in winter very cold weather. And my son also loves this place. There are a lot of playground such as mart, shopping mall and so on, even though in my apartment once in a while.

Third thing is reading books especially just before turn off the light. I say to my son. “Young boy! Come on, go to the bed, and have to sleep!”, and then my son response instantly “No. I want to read the book, read to me, one, two, three!!” this is conversation before fall asleep.

#3


Last thing is kitchen play structure is a kind of toy. He cooked as this toy and give it to me every night. I think he loves cook like his mom. And upper picture that is very funny. My son is having this toy taken by my daughter. She is very active not like my son. So My daughter always win him. My son also concede as well.

Thank you~!

2014년 4월 17일 목요일

고난주간 성 목요일 묵상 2014년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 요한복음 13:5



주찬양 증인들의 고백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고난주간에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어 기억을 위해 정리해두고 싶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사건이 아주아주 기억하고 싶은, 또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였을 것이다. 이 말씀 13장 처음부터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것을 아시고 발을 씻겨주시는 것으로 나온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위기였을까? 형용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 때 그 마음을 갖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눈을 바라볼수나 있었을까?! 

내가 오늘 나눌 에피소드는 여기에 비하면 그냥 넘길 수 있는 작은 경험이지만 이 사건을 겪은 날이 고난주간이니 나에게 개인적인 뜻이 될 것 같아 써 내려가본다. 

첫번째는 발바닥을, 그것도 정 가운데를 푹 찔린 사건이다. 아팠다. 걸어다닐 때 절룩 거릴만큼 딛고 서있기 힘들 만큼 좀 오래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조금 아픈 것을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고초에 비교하여 그 아픔과 시련 당하신 것을 가늠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정도 찔린 것도 아픈데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것은 초딩의 생각일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어떤 아픔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 처럼 단지 이 시기를 기억하고 은혜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당해야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하셨다. 

두번째는 버림받는 꿈이다. 꿈에서 하늘을 날았다. 아주 중요한 물건을 나르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잘 날수 있었고 쉬웠는데 높이 갈 수록 점점 높이감이 보이면서 무서워지기 시작한거다. 그러면서 추락하고 말았다. 내가 나르던 물건을 떨어 뜨렸고 거기서 나쁜 물질도 흘러나와 심각해졌다. 나의 형편없음이 다 드러났고 아주아주 형편없는 (근데 꿈에서 그게 다 맞다고 인정했다) 놈에 불과 했고 구제 불능이었다. 그래서 내가 버림을 받아도 뭐라 반박 할 수가 없었다. 그 꿈을 꾼 날 밤에 시간마다 깨면서 이상했는데 결국 이 꿈으로 깨어나고 말았다. 시간은 새벽 4시여서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일어나선 꿈이 잘 기억이 안났는데 출근하다 버스에서 졸린 가운데 다시 생각난것도 신기했다. 

두 에피소드를 생각하면서 나는 절망스럽지만 예수님의 고초와 십자가 죽으심으로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하나는 작은 육체의 아픔으로, 또 하나는 마음의 아픔으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도 기억할 만한 고난주간 사건이었다. 

고난주간 성 목요일에..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고난주간 성 수요일 묵상 2014년

그 제자가 예수의 가슴에 바싹 기대어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 요한복음13:25, 새번역


아름다운사람들 "유다 같은 나"


첫째 아들 보배(태명)는 이제 40개월이다. 말도 곧잘 하고,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보배는 어린이집에서 말씀을 암송하는데 (지금 줄줄 암송하는 구절만 7개) 어제도 자기전에 해보라고 했다. 이번엔 말씀 구절이 워낙 길어서 같이하다 내가 틀리니까 거꾸로 나를 가르친다. 자기 말을 따라하라는 거다. 내가 보배에게 가르쳤던 그대로 말이다. 어찌나 놀람과 웃음이 나오던지 한참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그만큼 내 아들은 크고 있었다. 이제는 하나 둘씩 내가 손이 가야하는 것도 혼자서 한다. 신기하기만 하다. 화장실도 이제 같이만 가면 알아서 잘 한다. 앞으로 이렇게 그는 나의 손길을 덜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이제 혼자하는 걸 더 좋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만큼 육체적이지 않은 정신적인 부분, 또 영혼의 문제에 가까이 가도록 신앙의 훈련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기에 총체적으로 봐서는 커갈 수록 서로를 공유하는 시간은 많아질 거라 기대해도 되겠지?!

하지만 보배는 아직 어려서 대화중 대부분이 소위 통제적인 말, 명어조가 많다. "그거 안돼, 이거해, 먹어" 등등이 주요 저녁 시간에서 잠들기 까지 분위기다. 

어느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그대로이고 보배는 커서 나와 같은 키에 같은 눈 높이로 대화하는 상상이다. 그냥 문득 든 생각인데 미래를 잠시 엿본거 같은 뭔가 모를 감정이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미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기에 보배가 커서 어떻게 같이 지낼까는 그저 상상에 불과 했는데 (좀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나는 그대로이고 보배만 커서 나랑 같은 나이 혹은 같은 성인이 되어 내 옆에 있게되면 어떨까? 이것은 참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아, 인격적으로 대하는게 이런거구나' 느낌이 왔다. 지금 비록 그가 어려서 부모에 의해 많이 통제를 받아야하지만 어느정도 크면 전혀 아닐 것이다. '아, 그럼 내가 보배를 어떻게 대해야하지? 적어도 마음만으로는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예수님은 누가 자신을 팔지도 다 아셨으면서 끝까지 그를, 그리고 모두를 정말로 인격적으로 대하셨다. 어찌 이럴수 있을까 할 정도로 평안하셨고 자신의 때가 가까이 오셨음을 아셨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인성보다 이제 신성에 더 가깝께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 것 같은데 여전히 그 한사람을 포함해 모든 제자들과 또 우리 모두를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셨다. 신성이 인격을 대하는 모습이다. 인성은 참 인격적이지 못할 때가 많은데 우리에게 내려오신 신성은 우리를 진정한 인격으로 대하셨다. 

내가 보배에게 온전함으로 대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나도 하나님을 그와 같이 대해야겠다. 하나님이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니- 새로워지는 순간이다! 

고난주일 성 수요일에..